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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Romeo!

로미오, 당신의 이름을 버리세요. 그 이름 대신에 이 몸을 고스란히 가져가세요.








Oh, Romeo!














중간고사가 끝난 학교는 다가오는 축제를 맞는 분위기에 들떠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작년과 달리 올해의 축제가 내게 즐겁지 않은 기억이 될 거라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어제 반장들끼리 모여서 제비뽑기로 정하게 된 우리 반의 축제 테마가 일일카페라는 다소 심심한 것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7반이 연극을 한다는 것에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부에서 소품과 의상을 지원 가능한 작품을 찾다보니 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7반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 반에 로미오가 이미 있으니까 하는 거다.



“여자애들 난리 났더라.”



귀신의 집이 테마로 정해져 저승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9반의 이석민이 점심시간을 틈타 우리 반에 찾아와서 대뜸 던진 말이었다. 비어있는 내 앞자리에 풀썩 앉은 석민은 자기 반이라도 되는 양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전부 말을 걸더니 다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최한솔이 로미오 한대.”



연극을 하는 것이 7반으로 정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남자 주인공은 최한솔이 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최한솔은 입학했을 때부터 유명했으니까. 물론 잘생긴 거로 말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닮았다나 뭐라나……입학하고 한동안은 복도를 지나가기만 해도 여자애들이 최한솔을 졸졸 따라다니고 흘끗거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작년 축제에는 최한솔네 반이 일일카페를 했었는데 최한솔을 보러 온 다른 학교 여자애들 때문에 학교가 개판이 된 적도 있다. 평소에도 그 지경으로 인기가 많아 뻑하면 여자애들이 최한솔을 왕자님이니 뭐니 낯간지러운 별명으로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작금의 상황은 충분히 예상한 바다. 그런데 거기다가.



“줄리엣은 윤슬아래. 난리 났다 지금.”



상대역인 줄리엣은 학교 여자애들 중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윤슬아란다. 윤슬아는 최한솔이랑 같이 7반인 기집애인데 뭐, 그래, 그냥 존나 예쁘다. 학교의 남자애들은 전부 윤슬아한테 죽고 못 사는 그런 존재다. 하여튼 올해 초 최한솔이랑 윤슬아가 같은 반이 됐다고 했을 때 우리 학교 다니는 애들은 전부 그 둘이 머지않아 사귀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한 학기가 다 지나고 2학기가 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마 이번 연극을 하고 나면 결국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예상과 기대로 여자애들이 다 뒤집어 졌다는 이야기를 킬킬대며 전하던 석민은 내 옆자리로 돌아온 민규를 보고는 인사도 생략한 채 똑같은 소식을 다시 전했다.



“헐, 대박. 최한솔이?!”



책상 서랍에서 만화책을 꺼내던 민규가 특유의 호들갑으로 대답했다. 석민과 민규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는 다시 하고 있던 숙제 노트로 고개를 떨구었다.



“하긴. 최한솔이 해야지, 그런 건.”

“그 새낀 생긴 것부터가 남자 주인공이야.”

“크으. 우리 반이 연극 걸렸으면 내가 로미오 하는 건데. 여자애들 작살난다 그냥.”

“웬 지랄.”

“사실을 말하는 거다?”

“지라알.”

“아 존나…… 나의 잘생김을 인정 못하는 이석민은 죽어라. 치도리!”

“하. 고작 치도리 따위로 감히 나를? 나선환!”

“야. 너네 다 시끄러워. 딴 데 가.”

“부승관은 왜 갑자기 짜증이냐.”

“그러게.”



만화 흉내를 내면서 노느라 시끌시끌하던 둘에게 찬물을 끼얹은 내게로 비난의 화살이 돌아왔다. 그냥 이어폰 끼고 노래나 들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이어지는 석민의 말에 더더욱.



“로미오 뺏겨서 썽났냐?”

“뭘 뺏겨, 뭘.”

“최한솔이지 누구겠어. 그치?”

“썽났네, 썽났어. 으이구 승관이 한솔이 윤슬아한테 뺏겨서 화났쪄요?”

“썽 안 났거든?”



다시금 최한솔 얘기를 꺼내는 이석민도 싫고 그거에 냉큼 거드는 김민규도 싫다.



“야, 연극 가지고 무슨. 그리고 별로 뺏어가도 상관없거든, 나는.”



솔직히 방금 그 말엔 실수가 있었다. 상관없거든 하는 대목에서 목소리에 울컥한 기분이 묻어나온 것 같다. 존나 상관있는 것처럼 들렸겠지. 둘의 표정이 더 음흉해지는 것을 보니 아마도 존나 상관있는 내 기분이 들킨 것이 분명한다. 아, 짜증나. 그러니까 최한솔 이 새끼야. 너는 왜 로미오여서는.


















*     *     *




















내가 옆집의 로미오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처음으로 학교란 것을 다녀보게 되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등교한 날 교실 문을 열자 맨 앞줄에 외국인이 있었으니까. 그날 교실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전부 걔를 한 번씩은 쳐다봤었다. 자기소개 시간이 되어서야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의 피가 반반 섞인 아이인 것을 알았고 이름이 최한솔이라는 것도 알았다. 첫 수업이 끝나고 학교 앞까지 데리러 온 엄마의 손을 잡고 집에 가면서는 그 애가 우리 옆집에 산다는 것도 알았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 이웃사촌.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래도 그 당시의 최한솔은 귀여운 구석이 많았다. 예쁘장하고 곱상한 얼굴에 맞지 않게 장난이 심했지만 나보다 키도 체격도 조금 작았던 최한솔을 내가 반 살 정도 어린 동생으로 생각하고 잘해줬던 것도 사실이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6년 동안 같은 반이 되기도 다른 반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는 집에 갈 때는 꼭 학교 운동장에서 같이 만나 집에 가는 암묵적인 룰을 잘 지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한솔은 나만 보면 애처럼 앵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어서 나는 6년 내내 작은 최한솔을 등에 매달고 다니는 처지였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은 왜인지. 우리의 친분이 단절되었던 중학생활을 지나 최한솔은 3년 만에 혼자만 훌쩍 자란 채로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어릴 때와 비교하면 한참 위로 올라간 눈높이에서 교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씨익 웃는 최한솔을 보면서 여자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쟤 잘생겼다며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 새끼는 사는 평생을 저 소리를 듣고 살겠구나 생각했다. 3년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돌아온 최한솔이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우리는 나란히 앉은 채로 고등학교에서의 첫 날이 끝날 때까지 별 대화를 하지 않았다. 반가움보다 더 큰 어색한 기류가 우리의 사이에서 맴돌았다. 나는 최한솔에게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를 몰랐다. 많이 컸네? 더 잘생겨졌다? 뭐하고 지냈어? 무슨 말을 하려거든 입을 열면 괴상한 헛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림 같은 얼굴에 미미하게 무료한 기운을 띄운 최한솔이 그 날 내내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어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낮아진 남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면서 나는 최한솔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척을 했다.


그리고 그때 나를 이상한 우울에 빠지게 했던 열일곱의 최한솔은 1년이 지나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얼굴을 하고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옆에 서있다. 올해 다른 반이 되면서는 등굣길에 최한솔을 만나는 것이 처음이니 이런 상황은 참으로 오랜만인 것이다.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다니는 어린아이 같은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마도 그렇게 된 데에는 언젠가부터 최한솔을 피하고 싶었던 내 마음 탓이 크겠지만. 나보다 늦게 등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최한솔과 몇 분 전 동시에 현관문을 열고 나와 마주쳤을 때는 잠깐 잊은 물건이 있는 척을 하면서 집으로 다시 들어갈까 생각도 했을 정도니 말이다. 물론 내 얼굴을 보고 안녕이라며 인사하는 최한솔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못 했고 대신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오, 오랜만이다. 엘리베이터 안의 어색한 기류를 견디지 못하고 건넨 말에 최한솔은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또 다시 뛰쳐나가고 싶은 적막이 찾아왔다. 마침맞게 1층에 도착해 열리는 문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빠져나온 나의 옆으로 곧 최한솔이 따라붙었다. 학교까지는 걷고 버스를 타는 시간을 다 합해서 35분. 이대로 계속 아무 말도 없이 가기에는 더없이 이상한 시간이다. 그러니까 그냥 아무 말이라도 해야 덜 어색할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최한솔을 보고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화제를 꺼냈다.



“너 연극한다면서.”

“어.”

“그거 뭐더라…… 로미오와 줄리엣?”

“어. 아. 존나 하기 싫은데.”



그냥 소품담당이나 하고 싶었다며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한 최한솔이 중얼거렸다. 안 한다고 하니까 애들 존나 지랄하더라.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한 최한솔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 싫은 게 있으면 최후의 최후까지 안 하려고 버티는 최한솔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7반 애들이 어떤 지랄을 해서 그걸 얘한테 시키는지 왠지 상상이 간다. 최한솔이 특히 싫어하는 게 오글거리는 짓 하는 건데 그런 놈한테 연극 주인공을 시키고 그것도 로미오 역할을 시키다니. 아마도 그건 연극 티켓값으로 대박을 쳐보려는 7반 아이들과 전교의 모든 여자애들의 염원이 이루어낸 기적은 아니었을까.



“왜. 나는 좋을 거 같은데.”

“뭐가. 연극?”

“어. 좋겠다, 너는.”

“뭐가 좋냐. 귀찮아 죽겠다.”

“아니 그래도…… 줄리엣은 윤슬아라면서.”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말장구를 쳐주려다 보니 대화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간다. 최한솔이랑 윤슬아 얘기를 할만한 심정은 아닌데 왜 내 터진 입은 내 마음을 듣지 않는지.



“그게 왜.”

“어? 어……그냥 부럽잖아……”



최한솔은 대답 대신 나를 쳐다봤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연극을 하기 싫어하는 입장에선 내가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윤슬아가 왜?”

“그냥…… 예쁘고 인기도 많고……? 아, 그냥 그렇다고.”



찡그려진 최한솔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나는 윤슬아에 대해서도 다른 이야기로도 더 이상 최한솔에게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버스가 도착해 올라타고 학교 근처의 정류장에 내릴 때까지 우리는 서로 앞뒤 자리에 앉아서 다시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았다. 정류장에 내려서 다시 나란히 걷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최한솔이 나지막이 말을 꺼내었다.



“너 혹시 윤슬아……”



그리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혼자서 “아니다.” 하며 다시 입을 다물어버린 최한솔의 옆에서 나는 교문까지의 걸음마다 느껴지는 최한솔의 숨이 막힐 것 같은 저기압을 느꼈을 뿐이었다.


















*     *     *




















축제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후로 학교는 내내 어수선했다. 교실에 앉아있노라면 여기저기서 이반 저반의 소식을 물어다 오는 아이들로 하루가 들썩였고 쉬는 시간이면 매번 일일카페 아이템에 대한 설문조사가 반장에 의해 이루어지곤 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7반의 연극 역시도 별 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같았다. 물론 개중에는 학교를 들썩이게 할 만한 소식도 있었다. 원치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 최한솔과 윤슬아가 밤낮으로 함께 연습을 하느라 부쩍 친해졌다는 그런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런 소식이 거짓이길 믿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사실 그런 소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려고 하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최한솔에게 물어볼 엄두를 내지는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최한솔에게 윤슬아의 이야기를 굳이 할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못 되었다. 나는 그저 날이 갈수록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가는 교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마도 우리 학교에서 그 둘의 사이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 좋은 소식은 예기치 않게 흘러들어오는 법이다. 지금처럼.



[야]

[최한솔이랑 윤슬아 연극에서]

[키스 두번한댘ㅋㅋㅋ]

[대박이지]



일일카페에서의 메뉴를 정하느라 분주한 HR시간, 내게 날아든 비보는 간결했다. 석민의 톡에 뭐라 대답하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이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척하는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연극에 그런 장면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최한솔이 로미오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 ‘로미오와 줄리엣’을 빌려다 읽었으니까. 그것도 학교 도서관에서는 왠지 찔려서 빌리지도 못하고 구립도서관까지 가서 빌려봤던 거다. 내가 본 바 원래는 키스씬이 세 번 정도 나오더만 그것을 두 번으로 줄였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지난 며칠 간 고등학교 수준의 연극이니까 그런 장면을 아예 없앨 수도 있다는 조금의 기대도 했지만 아무래도 부질없었던 것 같다. 엎드린 내 머릿속에선 어느새 근사한 의상을 차려입은 채 윤슬아에게 키스하는 최한솔의 얼굴만 떠오른다. 눈을 감고 입을 맞추는 둘의 그림은 퍽 아름답겠지. 나는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을 안고 눈을 감은 채 차라리 잠의 세계로 뛰어들고 싶었다. 아. 제발, 로미오, 그 이름을 버려줘.


















*     *     *




















연극 연습이 아침부터 있는 날이면 평소보다 일찍 나온다는 최한솔과 또 마주쳤다. 이러다간 축제 때까지 한 주에 몇 번씩 마주칠 것 같으니 내일부터는 등교시간을 몇 분 늦춰야겠다. 키스씬 연습을 하러가는 최한솔과 더는 마주치기 싫으니까 말이다. 최한솔이 싫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말할 이유조차 없다, 사실은. 하지만 지금은 싫다. 최한솔이 아니라 그 주변의 상황이. 그 주변의 상황에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이. 우리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게 된 이후로 나는 완전히 최한솔의 바운더리 밖에 있다. 내가 캐내지 않으면 최한솔은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연극 이야기도 그렇다. 내가 최한솔이 그 연극을, 그런 역할을, 그런 장면을 연기하는 것이 못내 싫은 것과는 별개로 최한솔부터가 그런 이야기를 내게 먼저 전하지 않는 것이다. 예전이라면 본인이 먼저 투정조로 주절주절 이야기해도 충분할 것을.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우리가 둘 다 변한 탓이렷다. 다만 최한솔은 점점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뿐이고 나는 지금의 최한솔과 상관없어진 과거의 최한솔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아. 존나 졸리다.”



나의 깊은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 옆자리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한 최한솔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금방이라도 잠들 태세를 취했다. 시간은 등교하기에는 조금 이르고 버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최한솔은 정말로 잠에 들 것 같았다.



“있잖아.”

“왜.”



눈을 감고 있던 최한솔이 내 말에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을 받은 눈이 옅은 색으로 빛났다. 아마도 그의 어머니에게서 비롯됐을 눈은 평소에는 티가 안 나다가도 이렇게 빛을 잔뜩 머금으면 색이 조금 옅어지는데 난 이런 때의 황홀경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빛에 나는 하려던 말을 그냥 집어넣을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입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너 연극에서 키…스씬 있다면서.”



내 말에 최한솔은 조금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하고 나를 쳐다봤다. 몸을 살짝 일으킨 탓에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게 된 최한솔의 눈이 다시 어두운 색을 했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최한솔의 표정에는 뜬금없이 이런 화제를 꺼낸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해서 나는 조금의 헛소리를 덧붙이고 말았다.



“좋겠다고 그냥. 부러워서 말해봤다.”



다른 게 부러운 게 아니다. 나는 그냥, 윤슬아가 부러운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 아쉬운 마음에 투정처럼 부려보는 거다. 물론 최한솔은 별 반응도 안 하겠지만.



“야.”

“응?”

“너도 하고 싶냐, 그런 거.”

“그런 거 뭐?”

“키스.”

“……”

“윤슬아랑? 하고 싶어?”

“……아, 몰라.”



살짝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말하는 최한솔이 왠지 낯설어서 나는 몸을 좌석 밖으로 살짝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한참이나 나를 빤히 보던 최한솔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학교까지 가는 버스 안은 요즘 우리 사이에 늘 내려앉는 적막으로 가득해서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왜 이렇게 사서 슬퍼지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하는 걸까, 나는.


















*     *     *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나는 종종 악몽에 시달렸다. 사실 그리 심각한 건 아니다. 그냥…… 꿈 속에서 무대 위의 최한솔이 윤슬아랑 키스를 하고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와중에 나 혼자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 처음 그런 꿈을 꿨을 때는 기분이 정말 더러웠는데 몇 번 더 꾸고 나니까 뭐, 아무렇지도 않다. 울면서 깨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누운 채로 조용히 눈을 뜨고 조금의 공허함을 느끼는 정도. 이런 기분은 이미 최한솔과의 관계에서 매일같이 느꼈던 것이기에 나는 단련이 돼있다. 그러나 찰나의 공허함이 지나간 후에 울고 싶어지는 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근 일 년 동안 좀 더 단단해졌을 거라 생각했던 내 심장은 아직도 물러터진 모양이다.


1학년 때, 최한솔을 3년 만에 만났을 때 생긴 어색함은 결국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첫날과 달리 우리는 점차 얘기도 많이 하게 되었지만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3년 동안 미국에 갔다 왔다던 최한솔은 내가 모르는 최한솔의 순간을 3년 치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급격하게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의 이야기. 다른 새로 생긴 버릇들. 깊어진 눈매로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시선. 여자아이들과의 관계를 유하게 유지하는 법을 배워온 듯한 태도. 톤이 낮아져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 손이 커지고 뼈가 단단해진 몸. 그냥 달랐다. 많은 것이. 거의 모든 것이. 최한솔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도 어릴 때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대할 수 없었다. 우리의 사이는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 있었으니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그 시작의 지점을 새로 정하면서 큰 실수를 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오묘한 감정으로 시작점을 찍었으니 날이 갈수록 시간이 쌓이면서 잘못된 감정이 같이 쌓였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는 알았다. 더 이상 친구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미국에 있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면 질투를 하고, 다갈색 눈빛이 나를 향하면 부끄러워지고, 여자아이들과 웃으며 얘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슬퍼지고,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치고, 단단한 손가락이 가끔 내 어깨에 올라오면 발끝까지 긴장이 됐다. 왜 그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너와 나의 관계가 잘못 시작된 건지. 아니. 왜 나 혼자만 다른 활주로를 달리게 된 건지. 내가 나쁜 게 아니라 나를 이렇게 만든 최한솔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온전한 나의 잘못이었다. 온전한 나의 잘못된 감정으로 시작된. 그러니까 그 시작의 지점을 그렇게 다시 쓰면 안됐던 거다.


1학기를 보내면서 조금 호전한다 싶던 최한솔과의 사이는 2학기가 되고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중학교에서 친해졌던 석민이랑 민규에게 이전보다 더 기대기 시작했다. 둘 다 나하고는 반이 달랐지만 2학기가 되어서 유달리 둘을 찾는 나에게 단지 ‘너 반에서 왕따냐?’ 하고 물었을 뿐 나를 귀찮아하지는 않았다. 나는 2학기 내내 최한솔이랑 할 것을 석민이랑 민규랑 같이 했다. 다시 우리 사이의 대화는 줄고 거리는 자리가 바뀔 때마다 멀어졌다. 최한솔이랑 같이 있으면 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나의 이기심 때문에 최한솔은 이유도 모른 채 내게서 배제되었지만 딱히 서운한 내색은 없었다. 사실 그건 당연했다. 최한솔은 나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테니까. 아마도 이미 최한솔에게 나는 무수히 많은 친구들 중에 한 명이 된 지 오래였을 것이다. 내가 봐도 내가 최한솔에게 특별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최한솔과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2학년이 되고 반이 갈린 이후로는 멀어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우리는 집 앞에서 만나 학교에 같이 가는 일도 없어졌고 따로 연락을 하는 일도 없었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치거나 최한솔이 우리 반에 오는 일이 아니면 얘기할 일이 없었다. 이제는 최한솔이 남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내 감정이 빠르게 사그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일은 없었나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한순간에 녹아버리는 것이 아니었나보다. 이렇게 내가 실패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여전히 가까이 지내면서 숨겼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는 정말로 이도 저도 아닌 사이가 되어버린 최한솔과 나를 생각하면서 나는 매일 눈을 뜨고 쓸쓸하게 잠에서 깬다. 그리고는 최대한 빨리 불유쾌한 꿈의 자국이 남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또 혼자만의 마음정리를 다짐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     *     *




















수업이 모두 끝난 축제 전날의 학교는 평소 같은 방과 후의 썰렁함은 온데간데없이 내일을 준비하는 아이들로 부산스러웠다. 두 시간의 노동으로 일일카페로서의 모습을 갖춘 교실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는 복도마저 소란스러워 축제가 끝날 때까지 나와 다른 세계로 느껴질 그 소음에 어쩐지 소외감을 느낄 무렵 앞서가던 여자애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작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여자애들의 무리 사이를 헤치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은 역시나 최한솔. 왜 이리 야단들인가 했더니 무슨 이유인지 최한솔은 연극용 무대 의상을 입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최한솔은 놀란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작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이에 보여주기에는 부끄러운 꼴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날 보자마자 시선을 피하는 것에 조금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지. 최한솔의 뒤로 보이는 역시나 무대 의상을 입은 윤슬아까지 보고 나니 내가 친한 척 끼어들 자리는 더더욱 아닌 거 같아서 그냥 지나쳐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순간만큼은 나는 파리스만도 못한 방해꾼이겠지.



“집에 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가려는 내 팔을 붙잡고 물어보는 최한솔 때문에 내게로 온 이목이 집중된다. 평생 여자애들이 쳐다보는 너랑은 다르게 나는 이런 시선은 당황스러운 사람인데. 이런 상황에서 씹고 지나갈 수도 없으니 나는 최한솔의 말에 대충 대답하며 잡힌 팔을 빼냈다.



“어, 어……너는?”

“리허설하고 왔어.”

“그렇구나. ……그럼.”

“오~ 최한솔. 잘 어울리는데~”



그럼 이만 가보겠다는 말을 하려는 참에 어느새 내 뒤로 왔는지 모르는 민규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최한솔에게 말을 걸었다. 얼떨결에 이도저도 못하고 최한솔이랑 마주선 채로 꼼짝없이 있게 된 상황에 처했다. 아니 진짜 김민규 이 새낀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거야. 내가 지금 최한솔이랑 시시덕거릴 상황이 아니라고.



“잘 어울리긴.”

“뭐야, 부승관. 까칠하기는. 질투하냐?”

“내가 무슨.”

“완전 최한솔 로미오 딱이구만. 내일 여자애들 쓰러지겠는데.”

“한솔아 안 가?”



시답잖은 대화를 하는 우리 사이로 몇 발자국 떨어진 윤슬아의 목소리가 뚝 떨어졌고 그 순간 내 심장도 같이 밑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친근한 듯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연극 연습을 하면서 친해졌단 소문이 맞구나. 정말 친해졌구나. 저기 서있는 줄리엣과 내 눈 앞의 로미오가 그렇게.



“아, 그냥 난 싫다고.”



일순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가 나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듯 눈앞이 깜깜하다. 마음에 없는 말을 되는 대로 내뱉고 민규의 팔을 뿌리치고 자리에 벗어난 나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마 뒤에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둘이 나를 보고 있겠지. 한순간 이상한 새끼가 되었어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나는 이상한 게 맞으니까. 누군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더니. 아니, 질투는 나의 독이다. 가슴은 또 울렁이고 심장이 갑갑하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로미오였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질투는 나의 독이다. 나는 안다. 나는 줄리엣이 될 수 없고 최한솔도 나의 로미오가 되어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의 독약을 나누어 마실 때 나는 질투의 독약을 마시고 차라리 죽어 버릴 것이다.




















*     *     *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져 있었던 걸까. 집에 돌아온 후에도 침대에 누워 내내 혼자 생각을 해봤지만 결국 전부 내 탓이라는 걸 알았다. 괜히 마음정리 하겠다면서 혼자 거리를 두고 난리친 게 역효과를 냈나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친구인 척을 계속 할 걸. 원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이렇게 후회할 일이 생기는 법이라더니. 교복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세상 모든 절망이란 절망은 다 끌어와서 자학을 하고 있는 내 귀에 벨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벌써 왔나 싶어서 거실로 나가 인터폰을 보는데, 이 새끼가 여길 왜 왔어…… 인터폰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있는 최한솔이 다시 벨을 누른다. 왜 이래, 왜 온 건데! 지금 지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 집에 없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인터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 갈 기세의 최한솔이 또 벨을 눌러 집안을 시끄럽게 하는 통에 나는 어쩔 수 없는 비척비척 현관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최한솔은 옷은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었지만 머리는 아까의 리허설 때문에 왁스로 만진 그대로였다.



“왜?”

“나 너네 집에 잠깐 있어도 되지.”

“왜, 왜.”

“집에 엄마 없어서 못 들어가.”

“……너네 집 도어락이잖아. 열고 들어가.”

“들어간다.”



최한솔을 집에 들일 기분이 전혀 아닌 나의 필사적인 방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최한솔이 문을 활짝 열고 나를 간단하게 문 안쪽으로 밀어넣고 돌진했다. 아니, 이 새낀 왜 이렇게 힘이 세. 멋대로 들어와 거실 소파에 천연덕스럽게 앉은 최한솔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참나, 혀를 찼지만 최한솔은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런 것도 손님이니 일단 마실 거라도 내가자며 감귤 주스를 컵에 따르는 나는 정말이지 보살이 아닐까. 이거 다 마시면 궁둥이 차서 쫓아내야지. 거실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고 나는 최한솔과는 조금 떨어져 앉았다. 최한솔이 우리 집에 온 건 초등학교 이후로 없으니 거의 5년만일 것이다. 그 5년의 시간 동안 우리 집에 바뀐 모습은 없는지 주스를 마시면서 여기저길 둘러보던 최한솔이 반쯤 마신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부승관 이리와 봐.”

“왜.”



거기 앉았다가 누가 심장 터질 일이 있으라고 내가 거기에 앉냐는 심정이 되어 까탈스럽게 대답했지만 최한솔은 계속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일단 와 봐.”

“아, 왜에.”

“할 얘기 있어.”

“무슨 얘기.”

“오면 말해줄게.”



나의 지속적인 거부도 한 고집 하는 최한솔에게 먹힐 리가 없었고 결국 나는 슬금슬금 최한솔에게 가까운 자리로 엉덩이를 옮겼다.



“무슨 얘긴데.”



왠지 모르게 심통이 나서 최한솔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내 손위에 서늘한 것이 툭 떨어진다. 고개를 숙여 보자 그것은 한다발의 종이 뭉치로 표지에는 <7반 연극 대본 ‘로미오와 줄리엣’> 이라는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연습 좀 도와줘.”

“뭐?”

“내일이 공연인데 아직도 대사 헷갈려.”



대체 이건 뭐하자는 건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으니 최한솔은 친히 내 손에서 대본을 가져가 페이지를 몇 장 넘겨 내 손에 그것을 쥐어주었다.



“거기서부터 할게.”

“참나.”

“아. 그리고 네가 줄리엣이야.”

“뭐?”

“시작한다. 대본 보고 나 틀리는 데 있으면 말해.”



대체 왜 가만히 이걸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날 사람인 내가 연습을 도와주기까지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막무가내로 대사를 시작하는 최한솔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대본에 두어야 했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체크해달라는 말에 또 친절하게 최한솔이 읽고 있는 대사가 맞는지 눈으로만 따라 읽는데 무슨 대사가 이렇게 간지러운지. 그런데 또 이런 간지러운 대사를 최한솔은 왜 잘만 하고 있는지. 최한솔 성격이라면 이런 거 하는 걸 부끄러워할 줄 알았건만 대사 한 글자 틀리는 곳 없이 잘하기만 해서 더 짜증이 난다. 야, 너 이런 거 고분고분 하는 성격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뭐해.”

“응?”

“줄리엣이잖아 그 다음에.”

“응?”

“줄리엣 대사라고.”

“나도 읽으라고?”

“그럼 연습을 주고받으면서 하지 나 혼자 다 읽냐.”

“야. 이걸 내가 왜 읽어.”

“줄리엣이잖아.”

“아씨…….”



이건 무슨 질투로 가는 급행열차도 아니고. 안 그래도 윤슬아 부러워서 죽을 거 같은데 내가 왜 또 윤슬아 대타를 해. 로미오고 뭐고 머리털을 뽑아버릴까 저걸.



“착한……순례자님, 그건, 당신 손에, 대한, 모욕……이에요.”

“국어책 읽냐.”

“아씨, 나 안 해.”

“알았어, 알았어. 그냥 해.”



말하는 내가 다 부끄러운 대사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나는 이런 사랑의 대사를 최한솔에게 속삭여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곤욕이었다. 쓸데없는 감정이입과 쓸데없는 질투가 동시에 폭발하는 기이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줄 한 줄 내가 최한솔과 부질없는 사랑의 대사를 주고받기를 한참. 마침내 대본이 거의 끝을 보여 이제 끝난 건가 싶을 때였다. 최한솔의 대사를 들으면서 대본을 한 글자씩 읽어나가다가 다음 장으로 넘기자 내게 찾아온 날벼락 같은 대사와 지문. ‘이렇게 키스하고 나는 죽는다. (키스한다)’ ……키, 키스? 아, 그 소문의 키스씬이 이 부분이구나. 지문이 당황스럽지만 지금까지 지문은 계속 생략해왔으니 아마 이번에도 그러겠지. 그럼 여기서 최한솔이 윤슬아랑 키스하겠구나 하며 조금 슬픈 생각을 하던 내 입술에 순간 와 닿은 따뜻한 기운.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을 감은 최한솔이 내게 입을 맞췄다가 떨어진 찰나의 충격이 곧 나를 점령해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버린다.



“지문에 있길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는 최한솔이 내가 들고 있는 대본 종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씨익 웃었다.



“아직 안 끝났어.”



나는 방금 전 최한솔이 내게 한 짓에 놀라서 세게 쥐는 바람에 구깃해진 대본으로 고개를 옮기고 더 이상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글자를 멍하니 따라 읽었다.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는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그럼, 당신의 입술에 키스할래요. ……응?”



멍해진 머릿속에도 다시 들어와 박히는 단어에 놀라 무심코 최한솔을 쳐다보자 최한솔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지문을 차마 행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그런 최한솔이 곧 다가왔다. 최한솔은 두 번째로 내게 키스했다. 대본은 내 손을 이미 떠나 거실바닥으로 스르륵 추락했고 최한솔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입술을 뗀 최한솔의 눈빛은 언젠가 버스에서 햇빛을 등지고 나를 보던 때와 닮아있었다.



“지문대로 왜 안 해.”

“……왜, 왜 한 거야?”

“…….”

“연극이라서?”

“아니.”

“그럼 왜?”

“너한테 키스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한참 동안이나 나를 보는 최한솔의 애타는 눈빛과 간절한 목소리의 출처와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그 유리알 같은 눈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     *     *


















지난 밤 있었던 일을 결국 나는 납득하지 못하였다. 최한솔은 한참이나 아무런 반응이 없이 멍해진 나를 쳐다만 보다가 내일 보자며 가방을 챙겨 일어섰고 나는 그런 최한솔을 배웅하지도 않았다. 나는 밤새 그 연극 같은 키스의 의미를 생각했지만 최한솔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말고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밤잠을 설치며 궁금증에 젖어 있던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단 최한솔을 피해서 등교하기 위해 축제 탓을 대며 아침밥도 먹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집을 나섰으나 곧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최한솔과 마주쳤다.



“아, 안녕.”



어색한 인사를 하고 최한솔을 빠르게 지나쳐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나의 걸음을 따라잡으며 내 뒤를 쫓아오던 최한솔이 내 팔을 낚아챘다. 휘청이는 나를 넘어지지 않게 받아준 최한솔이 내게 한 마디를 건넸다.



“미안.”



뭐가 미안하단 건지 짐작 가는 것은 하나지만 왜 미안해하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지가 않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 지 알 수가 없었다. 장난쳐서 미안하다고 하면 어쩌지. 그냥 잊어버려 하면 어떻게 하지.



“어제 너한테 키스한 거 미안.”

“…….”

“연극하는 것도 미안.”

“…….”

“그리고 너 좋아하는 것도 미안해.”

“뭐?”



최한솔이 내뱉은 말이 전기처럼 내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그 충격의 잔류인지 손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들은 말의 의미가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맞는 걸까. 나의 세계와 최한솔의 세계가 서로 좋아한다는 말을 다르게 쓰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에게 좋아한단 건 친구일 수 없는 감정이지만 최한솔에게 좋아한단 건 친구일 수 있는 감정인 게 아닐까. 그래. 최한솔은 미국에 있다 왔으니까. 그 나라에선 좋아한단 말이 그리 심각한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절대 기대해본 적 없는 상황이 내 앞에 펼쳐진 현실에서 일단 도망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끌어다 모으며 최한솔을 쳐다 봤다. ……아. 그렇구나. 나와 같은 세계에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구나.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익숙한 건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기적적인 동질감이라니.



“네가 싫다고 하면 셋 다 안 할게, 앞으로.”

“아니, 방금…… 야 근데 연극은 해야지. 오늘이잖아.”

“네가 싫어하면 안 해.”



머리가 어지럽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온전한 정신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아닐까.



“아 그런데. 사실 앞에 두 개는 안 할 수 있는데 마지막 거는 안 할 수가 없으니까 그건 취소. 이건 네가 싫어해도 난 계속 할게.”

“무슨……”

“오늘 연극은 어쩌지? 나 할까 하지말까. 빨리 말해줘. 결정하게.”



최한솔이 내게 반 발자국 정도 다가와 고개를 살짝 숙여 나를 쳐다봤다. 최한솔의 눈빛은 어제 보았던 눈빛과 다름이 없었다. 간절하고 애타는 시선. 내가 그동안 너를 바라본 것과 같은 그것. 그리고 거기에 섞여있는 묘한 확신. 사실은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내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에 얼굴에 천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한계치에 다다른 나를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빈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땡,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나는 최한솔의 시선을 뿌리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던지고 닫힘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외쳤다.



“하나도 안 싫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이…… 바보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사이로 최한솔이 웃는 게 보였고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로미오란 원래 사람 마음을 이렇게 갖고 노는 걸까.


















*     *     *



















한창 바쁜 일일카페에서 서빙을 하다 말고 빠져 나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문제의 로미오가 무대에 올라갔는지 확인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사실은 강당 뒤쪽에서 최한솔이 무대에 서는지 안 서는지만 보고 오려고 했건만 강당 입구에 있던 7반 반장에게 딱 걸려버린 거다. 한솔이가 너 오면 자리 주라더라. 그렇게 말한 7반 반장이 내게 안내한 자리는 무려 맨 앞줄 정중앙 자리였다. 맨 앞줄부터 앞에 몇 줄 정도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여자애들 가운데에서 나 혼자 남자였다. …최한솔 죽여 버릴까. 그렇게 빨리 연극이 시작하고 강당의 불이 꺼지길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 연극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는 최한솔 얼굴만 보고 나와야겠다는 의지가 여전히 있었지만 최한솔이 무대에 등장한 이후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대사를 칠 때마다 윤슬아가 아니라 앞자리의 나를 쳐다보는 최한솔 때문에 도망도 갈 수가 없었다. 연기는 왜 또 잘하는지. 무대에 올라간 걸 보니 왜 또 그렇게 왕자님마냥 잘생겼는지. 짜증이 나는데도 중간에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반강제로 끝까지 관람한 후 돌아간 교실에서 반장에게 마무리 타임이라 바쁜데 어딜 갔었냐며 잔소리를 들었지만 기분은 내내 붕 떠 있었다.


축제는 무사히 끝이 났고 일일카페는 나름의 수익을 내고 종료되었다. 막바지에 농땡이를 친 벌로 교실을 꾸미는 데 썼던 소품을 혼자 학교 뒤뜰의 쓰레기장에 버리고 돌아가는 길, 최한솔에게 톡이 와있었다.



줄리엣

잘 봤냐

어때?

                               잘 보긴 했는데

                               근데 내가 애ㅗ

                               줄리엣이야

왜 아니야

로미오랑 키스해놓고



최한솔의 막무가내에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이 휘둘리는 기분이 계속 든다. 그냥 평생을 최한솔 때문에 울고 웃을 팔자인가.



                               아 진짜

뭐가 진짜야

                               내가 왜 여자야

여자라고 안했는데

                               줄리엣이라며

넌 바보냐

줄리엣은

여자가 아니고

로미오가 사랑하는

사람이지



그래서 최한솔이 갑자기 이러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일 년에 가까웠던 내 고민과 우울과 번뇌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렇게 한순간에 이루어질 꿈인 걸 알았으면 나는 왜 그 마음고생을 해야 했는지. 그러나 한탄해봤자 늦었고 나는 이미 최한솔이 너무 좋아서 그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연이어 도착하는 최한솔의 메시지에 전화를 걸어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한다고! 그니까 그만 물어봐!”








그래서

내 줄리엣

해줄거야 말거야

빨리 대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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